변형과 자유

머릿속에 새로 꽂힌 노래가 반복해서 울리는 건 흔한 일이다. 비트가 강하게 들릴 때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직장에서도 그럴 때가 많다. 덕분에 핀잔 섞인 말들을 자주 듣곤 한다. 근데, 노래보다 정열적으로 머릿속을 울리는 것들이 있다. 책에서 옮겨 적은 구절들이다. 리듬도, 음정도 없는 문장들이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나를 붙들곤 한다. 새삼 신이나 천사, 귀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머릿속에 새로 꽂힌 노래가 반복해서 울리는 건 흔한 일이다. 비트가 강하게 들릴 때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다. 직장에서도 그럴 때가 많다. 덕분에 핀잔 섞인 말들을 자주 듣곤 한다.

근데, 노래보다 정열적으로 머릿속을 울리는 것들이 있다. 책에서 옮겨 적은 구절들이다. 리듬도, 음정도 없는 문장들이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나를 붙들곤 한다. 새삼 신이나 천사, 귀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린다. 이를 닦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책을 읽을 때도 들린다. 오늘 아침 그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We set our friends free by our love for them.”

감명 깊게 읽은 에세이에 나온 문장이다. 인간의 무한한 탐욕을 진단하는 글이었다. 처음 읽을 때 문체의 결이 정교해 나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다만 좌파적 논조가 분명했기에 경계심을 유지하며 읽었다. 분배와 평등을 설파하는 글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런 글들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내어주면 사유가 잡아먹히기 마련이다. 사유가 전유되면 꿈을 꾸기 시작하고.

“우리는 사랑을 통해 친구들에게 자유를 준다.” 

맥락은 이렇다. 친구, “friend”와 자유, “free”라는 단어는 어원적으로 연결되어있다. 둘다 인도-유럽어족 언어에서 기원했고, 그 뿌리는 “사랑”, “소중한” (dear, beloved) 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다소 추상적인 계보에서 저자는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는데, 바로 ‘우리의 정체성은 자아의 충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유지되는 연결에 있다는 것’이다.

이 급작스러운 인과의 성립은 내게 석연치 안았다. 사랑, 우정, 자유라는 단어를 호출하고 모호한 연쇄로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시도가 납득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눈을 뜬 순간부터, 그 취약한 논리의 문장이야말로 집요하게 귓속에 맴돌았다. 나는 끝내 그 말에 붙들린 채 생각을 거듭했다.

에세이의 명제(인간의 탐욕)와 크게 상관 없는 생각이었다. 저자의 의도와도 무관한 방향의 생각이었다. 이 문장 뒤,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절제하고 스스로를 속박함으로 우정을 지킨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곧 알게 되겠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오히려 반대였다.) 다만 사랑, 우정, 자유라는 어쩌면 지나치게 보편적이면서도 이질적인 개념들이 서로 교차한다는 사실에 의의를 두며 이 문장을 고민했던 것 같다.

사랑 vs 우정

사랑인가, 우정인가. 흔히 받는 질문이다. 대답에 따라 누군가는 로맨티스트라 불리고, 또 누군가는 의리를 중시하는 친구라 불릴 것이다. 나는 이 이분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유라는 것은 상상을 동반한다 (feat. 김예림 교수님 & 우시키). 사랑과 우정을 상상하라 하면 나는 같은 얼굴들을 떠올린다. 사랑 없는 우정이 과연 가능할까. 우정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 (명사)1. 이성(異性)의 상대에게 성적(性的)으로 이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 드물게, 좋아하는 상대를 가리키기도 함. 애정.
“첫∼”

2. 부모나 스승, 또는 신(神)이나 윗사람이 자식이나 제자, 또는 인간이나 아랫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위하는 마음의 상태. 때로, 자식이나 제자가 부모나 스승을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함.
“내리∼”
우정, 友情 (명사)벗 사이의 정분. 우애(友愛). 우의(友誼).
“∼을 나누다”
Definitions from Oxford Languages

두 감정 모두 그 대상—이성, 부모나 스승, 벗—을 기준으로 정의된다. 특히 사랑은 통상적으로 이성 간의 애정을 가리킨다. 그렇게 특정한 관계에게 감정의 의미를 협소화하는 방식이 나는 싫다. 우리가 연애 상대에게 느끼는 사랑과 부모나 스승에게 느끼는 사랑을 구획 짓는 기준은 무엇인가. 독점성, 신체적 욕망, 혹은 열정의 강도인가. 그렇다면 그러한 속성이 결여된 관계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친구와 가족에게 품는 애정은 어디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을 획득하는가.

사회가 임의로 정의하고 분류하는 과정에서 사랑이라는 개념이 과도하게 단순화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연애 중인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그들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사랑이라는 말은 자주 하나의 표식처럼, 관계를 규정하고 정당화하는 장치로 쉽게도 호출된다. 하지만 사랑은 고백이라는 행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구조화되는 국면에서 비로소 의식에 출현하는 것이다. 때론 관계의 종결 이후에야 비로소 인식되기도 한다.

영혼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몸에 부착된 형체 없는 자아를 뜻한다. 사랑을 논할 때 나는 내 자아가 타인의 영혼에 의해 변색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떠올린다. 웃음이 사라지고 피로해질 때 E1의 천진함이 떠오르고, 인내심이 소진될 때 M의 얼굴이 떠오른다. 대화 속 누군가의 말이 끊기고 묵살될 순간 K의 태도를 기억한다. 그렇게 특정한 사람들을 환기함으로써 나는 다시 웃고,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라진 말의 행방을 좇는다. 이 과정에서 나는 가장 고고하고 굳건한 양상의 사랑을 느낀다.

이런 영혼의 충돌 없이 사랑을 말할 수 없다. 아무리 격렬히 상대를 갈망했어도, 모든 것이 끝난 뒤 그 사람의 일부가 내 안에 남아 있지 않다면 사랑을 했다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는 논리가 달갑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은 특정한 대상을 겨냥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곁의 사람을 알아가는 동안, 어느새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경험한 가장 숭고한 사랑은 언제나 우정이라는 토대에서 돋아났다. 반대로 당신들이 사랑이라 부를 관계 속에서 그와 같은 영혼의 교환을 경험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단지 육체의 갈망이나 심장의 고동 때문에 후자를 사랑이라 부른다면, 그건 그들을 담지 않은 내 자아에 대한 기만일 것이다.

“자유”

요즘 들어 더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이 잦다. 과도한 욕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을 매일 만나고, 외로움에 빠질 틈도 없었다. 내가 갈망했던 것은 실은 자유였음을,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불가결한 요소임을 오늘 비로소 정립한 것 같다.

"We set our friends free by our love for them."

현대인이 진실된 자유를 경험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규율과 도덕, 법에 의해 제약을 받으며 살아간다. 심지어 체제의 강제적 압력이 부재하더라도 이미 짜인 질서 속에서 사고 자체가 구속된다. 사랑 vs 우정의 질문을 보라. 우리는 타인을 바라볼 때조차 사회의 언어를 통해 스스로의 (애초에 질서 따윈 없는) 마음을 재단하고 있지 않은가. 그 범주 자체가 우리의 이해를 가두고 심지어 조형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세상에서 내게 ‘자유’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 가장 추한 면까지 고백할 수 있음을 뜻한다. 불완전한 부분을 드러내고, 그것이 인정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사랑의 첫 대상이 대게 가족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족 앞에서 우리는 약해질 수 있고, 남에게 숨기는 결을 드러낼 수 있다. 송도에서 아무리 즐겁게 지내더라도 주말에 쏜살같이 집에 달려가는 이유다. 대학 생활, 끝없이 이어지는 인간관계의 압박 속에서 우리는 자유 그리고 사랑을 찾는다.

S라는 친구가 있다. 뉴욕에서 알게 된 친구다. 둘 다 글을 읽고 쓰는 일을 좋아해 언제나 서로의 글을 주고받았다. 그녀와 나는 글을 쓸 때 스스로를 검열하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을 있는 그대로 흘려 보냈고, 우리는 서로의 민낯까지 읽었다. 그 덕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유지하던 단정한 자아를 S 앞에서는 거둘 수 있었다. 덕분에 비로소 숨 막히는 뉴욕에서 호흡이 가능했다. 그녀의 말과 시선은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사랑을 가르쳐 준다.

자주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S 같은 친구가 하나쯤 있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견딜 만했을지 모른다. 주변을 보면 외로운 이들이 많다. 남들 앞에서 연기를 하듯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쾌활하고, 흔히 ‘필터 없다’고 불리는 사람들조차 자유롭지 않아 보일 때가 있다. 관계의 진실성과는 별개로, 자기 내면의 깊이를 한껏 고민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들에게 사랑이 필요함을 느낀다. 

그리고 동질감을 느낀다. 요즘 들어 더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이 잦기 때문이다. 주변 친구들이 나를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안에는 점점 말하지 못할 것들이 쌓이고 있다. 예컨대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내가 링크를 건넸다는 뜻이고, 나는 어느 정도의 친밀감을 전제했다는 뜻이다. 그러나—unless you are reading this translated—지난주, 내 머릿속 저자가 한국어로 사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를 것이다. 그 깨달음과 함께 밀려온 희열과 무력감에 마음이 참 희한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사소해 보일까 싶어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자유를 얻은건 E와 S, 그리고 F에게 내뱉은 12시간 뒤의 고백이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육체적 거리감은 속박의 시간을 길게 늘린다. 말이 많은 내게는 꽤나 지치는 일이다. 쓴 글을 여기에 올리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다. 내 안을 드러냄으로써 나는 자유를 느끼고, 우정을 키우고, 사랑을 얻는다. 

  1. 1학기 글쓰기 심화반 ‘자기표현 글쓰기’에서 「나는 E를 사랑했을까?」라는 글을 썼다. 이곳에 접속할 수 있는 친구들 가운데 그 에세이를 읽은 친구들도 있을 것이다. 그 글에서 나는 의도적으로 사랑을 정의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 글 속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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